<결혼의 여신> 조정선 작가 인터뷰
글 | 유슬기 인터넷뉴스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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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9일 여의도 작가의 작업실에서 조정선 작가를 만났다. |
드라마 본방 사수 못한 이들을 위한
<결혼의 여신-2013년 6월 23일부터 10월 27일까지 방영된 SBS 주말기획 드라마> 줄거리
재벌 2세에 검사라는 출중한 스펙을 지닌 남자 태욱(김지훈)의 일방적인 사랑을 받던 지혜(남상미)는 결혼을 앞두고 내려 간 제주도에서 올레길을 걷다가 건축가인 현우(이상우)를 만났다. 서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가치가 같았던 두 사람은 ‘서로 통했다’는 느낌을 받지만, 하룻밤을 같이 보낸 후 헤어진다. 태욱의 변함없는 사랑과 가족들의 기대, 이미 결혼할 것으로 알려진 주변의 눈 때문에 태욱과 결혼하는 지혜. 하지만 결혼 후 지혜는 자신의 꿈도 사랑도 포기한 채 그저 ‘청담동 며느리’로 살아간다.
한편 가난한 공무원집 딸이던 혜정(이태란)은 사랑하던 연인을 버리고 재벌 2세인 태진(태욱의 형, 김정태)과 결혼한다. 그녀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남편의 끝없는 외도와 부정, 혹독한 시집살이를 버텨낸다.
지혜의 언니 지선(조민수)은 1남2녀를 둔 워킹맘이다. 출중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남자 상사에게 불이익을 받고, 아이들이 장성한 지금도 시월드의 위세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가을운동회’같은 남편(권해효)은 지선을 아껴주고 그녀의 일을 지지해주는 가장 친한 친구다.
지선의 손아래동서인 은희(장영남)는 남편(장현성)의 변변한 외모에 반해 결혼한다. 방송국 앵커인 남편 뒷바라지에 혼신의 힘을 쏟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건 남편의 외도와 무시다. 결국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나는 은희. 과연 이들 중 결혼의 여신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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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결혼의 여신> 포스터 |
“나쁜 남자는 나쁜 남자에요. 나쁜 남자는 매력적인 남자도 아니고 좋은 남자도 아니고 그냥 ‘나.쁜’ 남자에요.”
도대체 모르겠느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작가, 질책보다는 안타까움이 배어있다. 먼저 지나온 언니가 딱 봐도 답 안 나오는 사랑에 빠진 여동생을 바라보는 눈빛이다. 아마 이런 눈빛으로 이 작품을 써왔을 거다. “야, 이 기집애야, 정신 차려.” 마치 극 중 지선(조민수)이 동생 지혜(남상미)를 바라보듯이. 말없고 수줍은 지혜가 작가와 가깝지 않을까 싶었는데, 실제 만나본 조정선 작가(42)는 화통하고 유머러스한 모습이 꼭 왕언니 지선이었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던 11월 9일 토요일, 작가의 여의도 작업실에서 커피 한 잔을 두고 마주 앉았다. 커피를 비우고, 눈물을 훔치고 일어설 즈음엔 작가에게서 지혜의 ‘사려깊은 눈빛’이 보였다.
#. 12회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지혜와 지선
지혜: 언니, 결혼은 어떤 남자와 해야 해?
지선: 네 형부같은 남자. 가을운동회 같잖아. 건강하고, 건전하고, 명랑하고, 씩씩하고, 예민하지 않고. 네 형부가 그래.
지혜: 결혼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하는 게 맞을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게 맞을까.
지선: 둘 다 사랑하면 좋겠지만 그래도 하나만 고르라면 나를 사랑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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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송지혜. 아날로그 적인 삶을 꿈꾸는 라디오 작가 |
표현은 직설적인데, 마음은 따사롭다. 대한민국의 여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였다고 했다. 혼수전쟁, 결혼재테크, 시월드와 처월드라는 말이 횡행하는 시대에 정말 ‘결혼을 잘 한다’는 게 뭔가에 대해 치열하게 탐구했던 이야기, 각자 다른 선택을 한 네 명의 여자 중 과연 누가 여신이었을까를 찾아가던 이야기. <결혼의 여신>은 마침표를 찍었지만, 보는 이들의 고민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어쩌면 결혼은 뭘 선택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감수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 같기도 해요.
-초반에는 내가 사랑하는 힘으로 버틸 수 있어요. 하지만 잘 봐요. 사랑받는 아이들은 자신감이 있어요. 사랑받는 여자도 그래요. 근데 항상 남자를 바라만보기만 하는 여자는 아니에요. 그 남자가 어느 날 변해서 나를 바라봐주고 나와 소통해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사랑을 구걸하다보면 패악을 부리게 돼요.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살았는데!” 친구관계든 애인관계든 부부관계든 기울어지면 안돼요. 그건 그 남자 잘못이 아니라, 그런 남자를 선택한 내 잘못이에요.
지혜(남상미)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태욱(김지훈)과 결혼했는데 왜 행복하지 않았을까요.
-태욱이는 지혜를 왜 선택했을까요. 지혜에겐 태욱이에게 없는 게 있었거든요. 건강한 가정환경과 바른 가치관. <위대한 개츠비> 보셨어요? 나는 고전도 내 맘대로 봐요.(웃음) 그건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에요. 한 남자의 열등감에 대한 이야기에요. 그 마을의 퀸카를 사귄 거예요. 근데 그녀는 톰 뷰캐넌한테 시집을 가요. 그 여자의 집 앞에 성을 짓고 파티를 하잖아요. 하지만 그 여자에게는 그 남자가 ‘한 때 만났던 남자’인 거죠. 그건 한 남자의 열등감에 대한 이야기라고 봐요. 나의 가장 잘 나가던 순간, 그 마을의 퀸카를 사귀던 시절을 복구하고 싶은 집착에 대한 이야기에요.
그럼 지혜는 왜 태욱이를 선택했을까요.
-사실 지혜같은 선택을 하는 여자들이 많아요. 주변에 등 떠밀려서. 결혼할 나이가 됐으니까. 사실 지혜는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걸 같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주는 사람이 필요해요. 지혜는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랐어요. 더구나 지혜에게는 책이 있었어요. 태욱이를 통해 보상받을 열등감이 없었죠. 올레 길에서 현우에게 통한 이유는 책에 대한 이야기, 말이 통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홀랑 넘어 간 거죠. 남자든 여자든 말이 안 통하면 오래 못가요.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가진 이들에게 던지는 돌직구
“결혼 앞에는 딱 두 가지에요. 조건을 볼 것이냐, 이상을 볼 것이냐. 근데 요즘 사람들 너무 조건만 봐요. 결혼 제도 자체가 망가진 거 같아요. 정말 진정한 사랑이란 게 있을까. 정말 사랑의 완성이 결혼일까.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두 명의 주인공이 있다. 조건만 철저히 본 혜정,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너무 늦게 깨달은 지혜. 그 두 주인공의 선택을 두고 어떤 대가를 치르는 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진짜 ‘결혼의 여신’은 배우자를 잘 선택하는 여자가 아니라, 그 선택을 통해 성장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을 데리고 일종의 시뮬레이션을 한 거군요.
-어릴 때는 부모가 중요하지만, 그 다음은 배우자에요. 부모는 인생의 절반이에요. 배우자는 제 2의 탄생이에요. 그런 화두를 던지고 싶었어요. 주인공은 완벽해서 주인공이 아니에요. 실수하니까 주인공이죠. 주인공들이 실수해주고 대신 겪어주면서 알려주는 거예요.
실은 네 명의 주인공이 입체적으로 결혼을 다각적으로 조명해줬죠.
-<결혼의 여신>은 여성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에요. 주인공을 작가로 정한 건 그래서에요. 가장 아날로그 적인 일을 하는 사람, 라디오 작가. 현우와 지혜는 라디오로 상대의 마음을 읽는 거죠. 그리고 그 둘의 이야기로는 너무 심심하니까 워킹맘이 등장하고, 남편만 바라보는 현모양처를 넣은 거죠.
#20회. 남편의 외도로 은희가 집을 나간 뒤 처음으로 고깃집에 마주앉은 은희와 남편
은희: 우리가 드라마를 왜 좋아하는지 알아요? 현빈을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돈 아끼려고 일부러 멀리 있는 시장에 다녀오는 길에 남편이 속상하게 하고 시어머니가 서운하게 할 때, 현빈같은 남자 만나서 딱 차 한 잔만 하고 들어가 밥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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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도 후 용서를 비는 남편에게 돌아선 은희(장영남). |
다른 드라마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남편의 구박을 받던 은희가 성공적인 커리어 우먼으로 변신했음에도 다시 가정으로 돌아간다는 거죠.
-사실 은희가 필호(은희를 연모한 젊은 남자. 극 중 외교관)를 따라서 샌프란시스코로 떠나면 편해요. 근데 그게 정말 탈출구일까요? 은희가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도 그래요. 막상 나와 보니 변한 건 없는 거예요. 젊은 남자가 “결혼합시다!”해도 그게 한심해 보이는 거예요. 결혼을 내가 한 번 한 것도 힘든데, 또 하자고? 그 치기가 반갑지 않은 거예요. 오로지 그녀를 위로해 줬던 건 시아버지가 “얘가 내 딸입니다” 라고 해주는 장면이에요. 마지막에 필호가 샌프란시스코로 떠나면서 은희한테 전화를 하는데 그걸 아들 장수가 받아요. 그리고 숙제하던 노트에 메모를 적죠. “은희씨, 저는 샌프란시스코로 떠납니다.” 은희는 그 종이를 혼자 간직해요. 남자들 긴장해야 해요. 여자들 마음에 뭐가 있는지 몰라요.(웃음)
은희 뿐 아니라, 시댁인 신영그룹과 정면승부를 벌이던 혜정도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데요.
-결혼의 ‘여신’이 되려면 자기 선택을 긍정해야 해요. 혜정이가 5천억을 받고 집안을 박살내야 여신이 되는 걸까요? 혜정이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밤에 딸 둘을 데리고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곳으로 데려가요. 이제는 시댁에 휘둘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이겨내는 게 진짜 이기는 거예요. 물론 모두가 컴백하는 게 능사는 아니에요. 그러자고 하는 이야기도 하니고요. 어떤 결혼은 정말 깨야하는 결혼도 있어요. 하지만 깨지 말아야 할 결혼도 있어요.
사실 극 중에서 지선(조민수)은 마치 극 중 작가의 분신이 아닐까 싶었어요. 너무 시원시원하게 맞는 말만 하고, 방황하는 주인공들의 앞길을 제시해주니까요.
-사람들이 저를 지선 닮았다고 하는데, 사실 제 모습은 지혜에요. 생각이 많고 사변적이죠. 지선이와 저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남편이에요. 우리 남편이 가을 운동회같은 남자거든요.
어떻게 지혜씨 같던 아가씨가 지선씨 같은 선택을 했을까요?
-우리 남편이 글 쓰는 여자를 좋아했어요. 밥 하는 여자나 빨래하는 여자가 아니라 여자가 자신의 재능을 가지고 발휘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거기다 가을 운동회 같아요. 작가 남편으로는 딱 인거죠. 내가 항상 그래요. 당신은 가을운동회 같은 사람이다. 이 말은 제가 이번 대본을 쓰면서 생각난 말이 아니라, 늘 남편을 떠올리면서 했던 말이에요.
‘가을운동회’같은 남자를 만날 수 있었던 비결은요?(웃음)
-사람은요. 잘 난 거 필요없고, 공부 잘하는 것도 소용없어요. 연애를 잘 해야 해요. 공부한다고 연애 안 한다는 아이들, 저는 절대 반대에요. 공부할 시간에 연애를 해야 해요. 우리 아들은 중2인데, 지금부터 여자친구 많이 사귀라고 해요. 공부 못한 건 회복이 돼요. 근데 배우자 잘못 만나면요.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하느라고 인생 후반기가 다 가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결혼을 속속들이 파헤치는 이번 작품을 쓰게 된 계기가 있다면.
-작가다 보니까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이 생각을 많이 하는 게 병처럼 되어 있어요. 남편이나 시부모한테 열 받을 때는 그 감정을 가만히 봐요. 이건 어디서 왔을까. 사회는 뭘 해 준거지. 출산율은 왜 낮을까.
분석한 결과는 어땠나요.
-우리 나이 때, 70년대 생들은 우리 어머니의 분노를 먹고 자란 애들이에요. 우리 70년생들의 엄마들은 고등학교 나오면 공부 많이 한 분들이었어요. 근데 남편들이 걸핏하면 가계부 가져오라고 해요. 돈 버는 유세를 해요. 그러면서 시집살이도 엄청나요. 그래서 딸들한테 그래요. 너는 엄마처럼 살면 안 돼. 그래서 엄마들이 우리를 밀어줬어요. 우리는 대학까지 나와요. 그러고 사회로 나왔는데, 사회는 달라지지 않았어요. 같은 엄마들이 아들과 딸을 다르게 키웠어요. 정부나 사회가 여자를 지원해주는 시스템도 없었어요. 여성들이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게 출산권이었어요. 그러니까 출산율이 떨어진 거죠.
그 다음은요?
-80년대 생들은 또 달라요. 그 때 엄마들은 딸을 알파걸로 키워요. 그나마 우리 때 있던 가족들에 대한 희생은 없어요. 얘들이 크면 골드미스가 돼요. 수컷이 사라진 시대에 남자들은 꽃미남이 돼요. 우리 때는 그나마 참고 살았는데, 80년대부터는 이혼율이 쭉 올라가요. 내가 본 사회현상은 그래요. 출산율이 높아지려면, 여자들이 행복해져야 해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손해 보는 일을 안 해요. 아이를 하나씩만 낳으면 ‘하나밖에 없는 내 새끼’가 되면서 사회는 더 각박해지는 거예요. 저는 사회분위기도 교육제도도 결혼한 여자들이 얼마나 행복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 30회. 5천억 이혼소송을 진행 중인 혜정, 자신을 위협하러 온 남편에게 어퍼컷을 날린 뒤.
혜정: 억울해요? 그럼 지금 차를 타고 나가서 강을 건너요. 강북에 가장 초라한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끊어요. 나 그렇게 모은 진단서로 당신한테 소송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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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탕한 재벌 2세 남편을 만나 눈물로 세월을 보냈던 혜정.(이태란) |
‘청담동 며느리’는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과 육아를 하면서 각박하게 사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아요. 우리 동시대 여성의 삶의 질이 동시에 올라가야죠. 청담동 며느리는 개인주의의 끝이에요. 자기 혼자 기득권 세력에 입성하겠다는 거잖아요. ‘청담동 며느리룩’ 이런 거 없어져야 해요. 똑똑한 여성들이 청담동 며느리가 돼서 자기만 잘 나겠다고 하는 건 반칙이죠.”
혜정이와 지혜가 청담동 며느리의 대표선수였죠. 두 사람의 며느리룩이 화제가 되기도 했고요.
-혜정이가 몰락하는 모습을 보여준 건 그래서예요. 가장 소소하고 평범한 결혼이 가장 아름다운 거죠. 나를 사랑해주는 건전하고 건강한 남자와 살면서 내 일을 하는 것이 최고에요. 저는 청담동 며느리를 비판하고 싶었어요. 기득권이 원하는 미모와 지성을 갖춰서 그 세계에 픽업되려고 기다리는 게 뭐에요? 시집 잘 가는 게 뭔데요? 돈 많은 시댁은요. 돈으로 자식을 좌지우지해요. 우리는 부모와 자식이 너무 밀착해 있어요. 부모의 돈에 기대서 하는 결혼은 시집 잘 가는 게 아니에요.
다음 작품(김수현 작가의 <세 번 결혼하는 여자>)이 늦춰지면서 연장 방송이 결정됐어요. 연장 분을 쓰는 게 작가에게나 배우에게나 쉬운 일이 아닌데요. 힘에 부치지는 않았나요?
-저는 종이가 모자랐어요. 예를 들어 뉴욕으로 공부를 하러 떠난 지선이가 비행기에서 “지금 서울 상공을 벗어 났습니다”라는 방송이 나오면 벌떡 일어나 “만세~!!”하는 장면도 있어요. (일동 웃음) 저는 주말연속극을 많이 써서 50~60회도 썼기 때문에 오히려 아쉬웠어요.
그 많은 이야기들은 다 어디서 오는 건가요?
-‘써야겠다’고 생각하면 생각을 집중해서 산을 타요. 우리 보조작가는 산에 뭘 심어놨냐고 하는데(웃음) 집중하면서 산을 타면 보여요. 마지막 장면(지혜(남상미)와 현우(이상우)가 올레길에서 다시 만나 함께 걷는 장면)도 10회 정도를 쓸 때 나왔어요. 그런 화면이 보여요. 그 인물을 느끼면 더 빨리 보여요. 굉장히 집중해야 해요.
궁금했어요. 한 사람의 작가가 그 많은 이들의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이요.
-모든 드라마는 추리소설이에요. 저는 에피소드로 드라마를 쓰지 않아요. 캐릭터로 써요. 예를 들어 조정선이라면, 사랑을 어떻게 할까. 그 캐릭터의 반응을 보면 이야기가 무궁무진해요. 줄거리 시놉이 아니라 캐릭터 시놉시스가 20장이에요. 저는 캐릭터를 주고 줄거리를 안 줘요. 나도 이야기가 어떻게 갈지 몰라요. 그 다음에 무슨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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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부작으로 종영한 <결혼의 여신> 대본 |
캐릭터 시놉시스가 줄거리 시놉보다 더 중요하다.
-그래서 저는 주인공 이름에 그렇게 신경을 안 써요. ‘남자 주인공 이름이 ‘김현우’가 뭐냐고~!’ 누가 그래요. ‘’노우빈’ 이정도는 돼야지~’ (웃음). 저는 이름을 특이하거나 이쁘게 안 지어요. 가장 평범하게 지어요. 그 사람이 정말 있는 사람처럼 만드는 게 중요하죠. 저는 아이들 가르칠 때도 그렇게 말해요. 혜정이도 우리 보조작가 이름이에요. 이름을 지어서 그 캐릭터를 살리는 게 중요하죠. 모든 여성을 대변하는 가장 평범한 이름인 게 중요해요. 은희도 제 제자 이름이고요.
시월드만큼이나 처월드도 처절했죠. 현우가 맞딱뜨린 처월드의 기개란.
-사실은 박준금(극 중 현우의 예비 장모)씨 대사 중에 주옥같은 대사가 많았어요. “여자는 남자 가슴에 살아야지, 현실에 살면 안 된다. 그 여자가 가슴에 있는데 너는 현실에 살면 파출부 밖에 안 된다.” 남자들 중에도 현우처럼 결혼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쁘고 착하면 결혼해요. 근데 결혼하고 나면 안 맞거든요.
동서고금 남자들에게는 예쁜 여자가 신부감 1순위인데요.(웃음)
-가만히 가만히 자기 마음속을 들여다봐야 해요. ‘편리한’ 결혼을 하면 안 돼요. 내 뜻대로 받아주는 예쁜 여자, 같이 살면 얼마나 편리할까. 그럼 내 인생에 죄를 짓는 거고, 그 여자한테도 죄를 짓는 거죠. 내가 지금 결혼할 타이밍인데 마침 그 여자가 곁에 있다고 하면 안 되는 거죠. 내 마음이 완전히 깨끗해져서 온전히 누군가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만나야 해요.
좋은 결혼이란 정말로 뭘까요.
-배드민턴을 생각해봐요. 내가 공을 던졌으면 와야 해요. 근데 돌아오지 않는 공을 기다리면 지쳐요. 화나요. 남녀가 사귈 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친 공을 얼마나 정성껏 받는지를 봐야 해요. 그건 사람에 대한 예의에요. 그게 없다면 아무리 멋지든, 나한테 도움이 되든 멈춰야 돼요. 초반에는 물론 밀고 당김이 필요하죠. 하지만 친구든, 연인이든 관계를 맺을 때 내가 친 공을 어떻게 보내느냐를 봐야 해요. 나보다 못 쳐도 돼요. 근데 그 공을 치려고 죽어라고 뛰어가서 받는 그런 정성이 있느냐는 거죠.
잊을 만하면 돌아오는 공은요?(웃음)
-(단호하게) 그것도 안 돼요. 그건 그냥 게임을 하겠다는 거거든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저는 그것만 봤거든요. 젊어서 그런 선택을 하기가 쉽지 않은데, 지금 생각해도 참 기특해.(웃음) 우리 남편 그 당시에도 머리 빠지고 배 나왔었어요. 근데 딱 한 가지, 정신 상태를 봤어요. 나를 소중히 여겨주고, 내 일을 중요하게 여겨줬어요. 저는 그 때 참 현명했던 거 같아요. 내 인생에 대한 자신이 있었어요. 우리 엄마가 우리 남편을 딱 보더니 (테이블을 탁 치면서) “저놈이다. 딱 됐다”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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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운동회 같은 남자와 결혼한 지선(조민수). |
살면서 계속 잘한 선택이라 여기세요?
-불만이 없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동지애가 생겨요. 근데 젊은 나이에 그런 선택을 하기란 힘들어요. 내가 기울어지는 건 그 사람이 아니라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거예요. 무엇 때문에 삐뚤어 졌는지를 내 유년시절부터 살펴봐야 해요. 결혼을 잘 하려면 자기 자신을 끝없이 들여다봐야 해요.
젊을 때 그런 선택을 하는 게 쉽지 않다는 말씀, 잊지 않을게요.(웃음)
-젊음이란 게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에요. 마지막에 혜정이랑 지선이가 ‘청춘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하는 데 동의하잖아요. ‘젊음을 칭송하는’ 사회치고 성숙한 사회가 없어요. 우리나라 가요 프로그램 보면 17, 18살 아이들을 벗겨서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어요. 프랑스만 봐도 드라마가 별로 없어요. 다큐가 전부에요. 우리나라 문화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잘 봐야 해요. ‘고등학생 아이들’이 우리 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과연 건강한가요. 노년은 아름다운 거예요. 성형으로 당겨야 하는 게 아니에요. 어떻게 꽃봉오리가 삶의 절정일수가 있어요. 이건 부끄러운 사회에요.
2년에 한 작품씩을 꾸준히 해왔어요. 2009년 <며느리 전성시대> 2011년 <솔약국집 아들들>, 2013년 <결혼의 여신>. 다 주제는 달랐지만, 뭐랄까 지키고 싶은 공동체의 가치가 있었던 거 같아요.
-먼저 <며느리 전성시대>에서 사실 저는 중간이 낀 윤여정 씨의 편을 들고 싶었어요. 시어머니에게 치이고, 며느리에게 치이던 여인들. 어머, 나 눈물 나려고 해요. 그 참았던 윤여정씨를 바라보고 싶었어요. 그러다 김을동씨(시어머니)가 쓰러져요. 집을 나갔던 윤여정씨가 버선발로 쫓아와요. 울면서 잘못했다고 그래요. 펑펑 울어요. 그러고는 다 잠들었는데 꿈에 김을동씨가 눈이 내리는 데 떠나려고 나와요. 근데 윤여정씨만 깨서 일어나요. 어머니가 신발을 안 신고 가는 거야. “신 신고 가셔야죠, 그냥 가시면 어떡해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들어가라고 그래요. “어머니 제가 같이 갈까요? 모시고 갈까요?” 했더니 아니라고 하면서 조용히 떠나요. 저는 그 때도 며느리나 어머니나 둘 중에 한 편만 들려고 한 게 아니에요. 시어머니 죽으면 가장 기뻐야 할 윤여정씨가 쓰러져요. 그걸 보고 어린 며느리가 깨닫는 거죠.
어머, 저도 눈물나요.
-<솔약국집 아들들>은 공동체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한 동네 사람들인데 아들들이 모자라고 매력이 없어요. 게다가 이웃들이랑 다 사이가 안 좋아요. 이런 웬수들이랑 자식을 교환하면서 다 가족이 되거든요. 모두가 잠재적인 가족이라는 이야기였어요. 주말 연속극이라고 해서 거실에서 밥먹고 안방에서 잠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삶의 화두 하나씩을 다루고 싶었어요. ‘고부’든 ‘모자’든 ‘부부’든요. <결혼의 여신>은 자신의 선택으로 다시 용감히 걸어 들어가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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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여신> 대본연습 현장. 맨아래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조정선 작가. |
제작발표회 때 <결혼의 여신>은 ‘저에게도 특별한 작품이다’라고 했는데요.
-한 드라마가 끝나면 3개월 쉬고 다음 작품에 들어가요. <결혼의 여신> 전에는 목디스크가 왔어요. 원래는 이 작품이 작년 11월에 했어야 했는데, 6개월 미룬 거였어요. 주말드라마 54회 64회 64회를 3개월 쉬고 연달아 했더니 몸이 아작이 난 거죠. 감독님이 많이 기다려 줬어요.
작품하면서 제일 힘들 때는 언제세요?
-목요일까지는 대본을 내야해요. 그럼 월화수 중에 글이 나와야 해요. 근데 화요일까지 글이 안 나와요. 그 때 느낌이 어떠냐면 히말라야에 오르는 알피니스트가 눈이 그치기를 기다리는 기분이에요. 눈이 그쳐야 산에 올라가니까요. 몸 상태가 나아지길 기다리는 데 그게 언제 올지를 몰라요. 그 때가 정말 고독해요. 그 공포감이라는 게 아무도 몰라요. 제가 작가된 지 14년인데 “야, 화요일 오후야, 과연 대본이 나올까”를 늘 생각해요. 작가는 감금된 생활을 해요. 쳇바퀴 같은 생활을 해야 해요. 그걸 못 버티면 작가가 못 돼요.
마지막으로, 저에게도 제일 힘든 질문이에요. 작품 초반에 김수현 작가의 <불꽃>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있었는데요. (극중 여자 주인공인 지혜의 직업이 작가라는 점, 지혜가 재벌인 남편과 여행길에서 만난 남자 사이에서 갈등한다는 점에서)
-만약에 제가 <불꽃>을 의식했다면 작가(지혜의 직업, <불꽃>에서 주인공의 직업 역시 작가였다)라는 장치를 바꿨겠죠. 직업을 바꾸면 피해갈 수 있으니까요. 처음에 비슷했다는 점을 인정해요. 다만 기다려주길 바랐죠. 그게 끝까지 비슷할 것인지, 과정이 비슷할 것인지. 사실 조금만 바꿔도 그런 논란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있어요. 저는 그녀가 작가여야 하는 뚜렷한 이유가 있었어요. 그게 제가 숨겨둔 장치였고요. 그리고, 앞부분은 제가 봐도 비슷해요.(일동 웃음)
‘해 아래 새로운 게 없다’는 게 작가로서는 어려운 일이기도 할 거 같아요.
-올레길에서 만난 두 남녀의 이야기. 여행길에서 만나는 건 사실 우리의 로망이잖아요. 대중의 작가는 클리셰와 신선함을 잘 섞을 줄 알아야 해요. 그 길은 제가 제주도를 가서 직접 걸어봤어요. 이중섭 집에 가서 생각했던 이야기에요. 이렇게 작은 집에서 서로 사랑하며 사는 부부도 있는데 요즘의 결혼은 어떤가.
긴 여정을 마쳤는데, 여한 없으세요?
-나는 끝나고 뒤도 안 돌아봐요. 할 때는 정말 열심히 하지만 끝나고 내 영광에 연연하거나 내 추억에 연연하지 않아요.
이런 분들이 연애도 잘하죠.(웃음)
-사람이 쿨 한 게 중요한데 작품이 히트했다고 해서 잘 나가던 나 자신에게 연연하면 안 돼요.
이제 뭘 하실 거에요?
-16일에 인도로 떠나요. 먹고 마시고 노는 여행은 하지 않아요. 네팔, 히말라야, 바위산 이런 데 가요. 가난하고 결핍되고 그런 곳에 가야 돌아왔을 때 우리 홈의 스윗( sweet)함이 있어요. 삐까뻔쩍한 곳에 다녀오면 내 그라운드가 얼마나 초라해 보여요. 여행을 가면 작가도 엄마도 아내도 아닌 오롯이 조정선, 그 초등학교 기집애가 보여요.
#35회. 결국 지혜를 보내주는 태욱. 네 쌍의 결혼남녀 중 헤어지는 유일한 커플
지혜: 태욱씨 미안해요, 태욱씨한테 좋은 여자 좋은 아내 못 돼줘서 미안해요.
태욱: 잘 살아 지혜야, 너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알았지?
등록일 : 2013-11-15 10:11 | 수정일 : 2013-11-15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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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하는 여자나 빨래하는 여자가 아니라 여자가 자신의 재능을 가지고 발휘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배우자 잘못 만나면요.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하느라고 인생 후반기가 다 가요.”
“나를 사랑해주는 건전하고 건강한 남자와 살면서 내 일을 하는 것이 최고에요.”
이 말은 꼭 내 생각을 표현한 것만 같다. 나의 두 딸들에게 귀가 박히도록 해준 말이다. 결혼은 선택이고 직업을 필수라고… 부모는 인생의 절반 중요하다면 배우자는 그 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결혼이 매우 중요하다.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하는, 그러나 후회해도 결혼한 사람들의 인생이 더 풍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