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 28일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 오늘, 내 나이 만 65세가 수 개월 지난 시점에 나는 평생 다니던 직장에서 정년퇴임을 했다. 그렇다면 현재 나의 정확한 연령이 얼마인지 바로 계산이 나온다. 우리 나이로 희수를 눈 앞에 두고 있다. 그 사이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야말로 세월이 유수와 같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나에게 이 기간은 그 앞의 수십 년과는 판이한 삶의 세월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평생 다니던 직장을 어느날 영원히 떠나야한다는 것은 커다란 충격이요 따라서 착잡한 감회가 없을 수 없다. 생즉업(生即業)이다. 산다는 것은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하던 일을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만둬야 한다고 상상해보라. 그보다 더 허망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나도 물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일시적이나마 당시 나의 앞날도 불안과 두려움의 안개로 오리무중이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그때 그 생각은 하나의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심정은 하늘을 훨훨 나는 새와 같다고나 할까. 자유, 평화, 행복, 낭만 등의 좋은 수식어들을 다 동원해도 나의 현재의 홀가분한 심정을 그려내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래서 그날이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그날은 나의 맏손자가 세상에 태어난 지 4개월 보름째가 되는 날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불원천리하고 녀석이 먼 서울에서 할아비 퇴임을 축하하기 위해 강보에 쌓인 채 어미, 아비 품에 안겨 식장에 웃는 천사의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동료 교수님들이 연신 귀엽다며 들여다보고 안아주기까지 하던 일이 기억난다. 그러던 그가 벌써 5학년이 됐다. 서울 강남 대치초등학교 학교 대표 축구선수이기도 하다. 내 손자지만 장하고 대견하다. 세월이 참으로 빠르다. 요새는 스마트폰이 유행인데 카톡에 ‘세월은 계곡을 흘러내리는 물이요,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다. ‘는 글이 올려진 것을 근자에도 본 적이 있다. 처음 듣는 말은 물론 아니다. 그런 글들을 대할 적마다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깨댣게 된다. 그러나 아직은 나의 활동이 거의 줄어들지 않고 있다. 신진대사가 활발하고 다행히 노인성 질환이 거의 없어 적당한 높이의 산을 오르는 일이며, 위험하다고 알려진 클리트 페달(cleat pedal)의 자전거 타기까지 꽤 힘드는 운동도 상당 수준 즐길 정도이니 말이다.
여기서 뚱딴지 같이 무슨 자랑을 늘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에게는 자랑거리라고는 아예 아무것도 없다. 자랑 끝에 쉬슨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자랑은 겸손과는 동떨어진 처신으로 경거망동이며 자화자찬이다. 노년의 미덕에는 겸손도 포함되어야 하겠다. 특히 나이든 사람이 남들이 잘 들어주지도 않는 같잖은 자랑을 늘어놓는 것만큼 주책없는 일도 없다. 다만 현재의 나의 이야기가 작은 것이기는 하나 하나의 사례로 본보기가 되어 공감하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나온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이 작은 소망이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이다. 오래 사는 것이 능사가 아니요 나의 목표도 아니다. 수즉다욕의 의미 또한 잊지 않으려고도 애쓴다. 그러나 지금은 백세시대가 현실로 다가와 있으니 어쩌랴. 인명은 재천이다. 사람에게는 사는 동안은 항상 꿈과 사랑 그리고 할 일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칸트가 말하는 행복의 세 가지 조건이기도 하다.
지나간 10년 사이 우선 퇴임 당시보다 몇 가지 면에서 달라져가는 내모습에 나 스스로도 의아해 할 때가 없지 않다. 이는 주로 아집, 독선, 선입견 등으로 점철되어 왔던 나의 못된 사고의 틀에서 상당 수준 벗어나 세상과 타협하는 쪽으로 내 마음이 서서히 바뀌어가는 내면적인 변화라 감히 말하고 싶다. 일예로 지난 날 나는 신앙과는 거리가 한참이나 멀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사람인 내가 아직 정식 크리스천이 된 것은 아니지만 성경을 수차례 완독했고 지금도 수시로 읽고 있으며, 기독교의 참된 정신이 과연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한때 깊이 생각하며 파고들기도 했다. 인터넷으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유명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보았고, 그것도 모자라 직접 설교를 듣기 위해 서울이며 수도권에서 알려진 크고 작은 교회를 수 십 군데나 찾아다니기도 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긍정적 평가다. 교회를 왜 열심히 출석해야 하는가를 이해하게 되었고, 목사는 우리 사회에서 꼭 필요한 존재이고 그들의 역할은 대학교수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도 알 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어보지도 않고 아무것도 모른 채 무조건 특정 종교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행위는 지성인의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기독교나 천주교 뿐만이 아니다. 불교 또한 긍정적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으로 이해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어쩌면 이런 나의 몸부림은 적자생존의 법칙이 지금의 나에게도 작용하고 있는 결과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 모두가 완전한 자유 의지로 내 자신이 결정하고 취사선택한 행위의 결과이다. 지금도 나에게는 할 일이 태산 같다. 잠시도 무료할 틈이 없다. 그러나 심적으로나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거나 감내하기 어려운 무리한 일은 가급적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매사 긍정적, 낙천적, 적극적 자세를 견지하려 애쓰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나의 평소 생활신조요 일관된 생각이다. 내가 평생 살아오면서 일하는 스타일은 “매사 쉽고 시원시원하게” 이다. 그렇다고 원칙을 무시하거나 불의와 타협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굳이 나의 삶의 신조를 들라면 근면, 검소, 그리고 정의라 감히 말하고 싶다.
오늘의 나야 말로 완전한 자유인으로 살고 있다. 이 자유는 곧 내 행복의 원천이다. 아무데도 얽매임이 없이 구속되지 않고 자율적으로 매사를 결정할 수 있으니 하고 싶은 일은 마음대로 할 수가 있다. 이 자유가 나에게는 무위도식이 아니요 방종은 더구나 아니다. 새로운 도전을 가능케 하는 에너지원이 되고 있다. 사람은 건강만 하다면 오래 살아도 나쁠 것은 없다. 새로운 도전을 할 수가 있고, 남에게 도움을 줄 수가 있고, 색다른 희열과 기쁨을 맛볼 수 있기에 그렇다. 이 나이에 사이클을 타고 아라뱃길이며 한강변을 누비고 춘천을 가고, 카톡이며 페이스북을 즐기고, 작은 일이나마 아이들을 가르치는 봉사를 할 수 있으니 하는 소리다. 그렇다면 퇴직은 결코 퇴보나 노쇠현상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발전과 퇴보, 보수와 진보,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지는 본인이 먼저 안다.
다행히 소위 말하는 노년 사고(老年四苦) 중 어느 하나도 아직은 나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지금은 어려운 전공 서적을 더 이상 읽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나는 누리고 산다. 이실직고하면 지난날 본의 아니게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덜렁 영어를 전공으로 택했던 나의 무지의 결과로 수 십 년 동안 나는 어려운 남의 나라 말, 영어와 씨름하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 한때는 소위 잘 나가는 영어선생 축에 든 듯한 적도 없지 않았지만 그거 다 남들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누가 나의 속 심경을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원래 알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이 우리 인간이다. 남 장에 가는 데 거름 지고 따라간 격이 되고 말았다. 내가 던진 주사위였으니 누굴 탓하랴. 그래서 열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퇴임을 하던 날 나는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앞으로 다시는 영어를 거들떠보지도 않겠노라’고. 그러나 세상사 뜻대로 되는 것이 어디 하나라도 있던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퇴임직후 하필이면 영어 없이는 살기 힘든 곳 뉴욕까지 가서 거기에서 네댓 해를 보내고 왔다. 싫으나 좋으나 나는 영어 피하고 살 팔자는 못 되는 모양이다. 설상가상으로 요새는 한문 배우는 꼬마들마저 내게 영어도 가르쳐 달란다. 이게 바로 즐거운 비명인가.
그러나 이제는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있고 하고 싶은 운동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 처지에 놓여 있다. 따라서 나의 생애에서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시기가 바로 작금의 세월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래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나에게도 퇴임 당시는 한때나마 암담한 시기가 있었다 했다. 신병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순간들도 없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나도 벌써 10여 년 전에 이 세상과 하직을 했을 사람이다. 그런나 현대 의학의 덕분으로 지금도 나는 이렇게 건재하다. 지금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 이런 내게 세상에 대해 무슨 불평불만이 있을 수 있으랴. 오로지 감지덕지하고 살 뿐이다. 10년 전 오늘 나의 앞날은 참으로 막막했었다. 한마디로 아무런 서광도 희망도 보이지가 않았다. 지금의 나의 처지를 도무지 예측하거나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유비무환이다. 만약 그때 조금이라도 10년 뒤 오늘을 미리 생각하는 지혜와 마음의 여유가 있었던들 지금보다 더 나은 발전된 내모습을 볼 수 있을 게 아닌가. 성취의 길은 목표와 방향설정이 중요하다. 살아 있는 한 사람은 끊임없이 심신의 활동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생즉동(生即動)이다. 물론 퇴임 후로도 게으름을 피우지는 않았고 이날까지도 열심히 바깥 활동도 계속하며 지내고 있다. 나는 아무런 재주도 장기도 가지고 있지 못한 둔재이다. 굼벵이는 구르는 재주가 있다던가. 나의 장기라면 오직 부지런한 것 뿐이다. 오늘 저녁도 한 두어 시간 쌀쌀한 밤 바람을 헤치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산책로를 나 혼자 걷고 들어와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지난 10년 동안에 거듭 난 사람으로 살고 있다. 중학교 교사로 교직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종국에는 교수로 교직을 마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내 면상 어디에 복 든 구석이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 가난한 시골 농가에서 태어나 중학교 진학도 못한 채 지게 지고 농삿일 거들며 한탄 하던 시절을 겪은 소년이 결국에는 대학교, 대학원을 마치고 최고 학위까지 수득을 한 성인이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또 있겠는가. 교원으로서도 나는 행운아였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두루 섭렵했다. 그뿐이 아니다. 지금도 수 년째 방학 때면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우리말과 한자 그리고 예절을 지도한다. 물론 나의 한문강좌에는 영어도 수반된다. 혈기왕성하던 시절 교사로 출발한 그 세월이 참으로 다행이었고 낭만적이기까지 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40년 교단생활 중 만약 중·고등학교에서 일하던 젊은 날의 열정과 사랑과 의욕과 생동감으로 충만했던 기간이 없었다면 지난 날들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허망했을까 하는 생각을 이따금씩 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교수로보다는 교사 생활이 내게는 더 보람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처음부터 교수로서, 학자로서 대학생을 지도할 만한 자질이나 능력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아직 그만한 준비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상호 성장한다(敎學相長)는 말의 의미 그대로 가르치면서 터득한 노하우의 축적을 통해 발전을 해온 결과가 가져다 준 보상이 꿈도 꾸지 못했던 교수직이었을 것이다. 교수직은 참으로 좋은 직업이다. 자기만 잘하면 그보다 보람되고 행복한 직업은 없으리라. 가르치는 것만큼 확실하게 배우는 길은 없다. 그것은 가르쳐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할 터이다. 그렇다면 한평생 나는 나 자신을 가르치면서 살아온 사람이다. 자발적으로 가르치는 기회를 만듦으로써 지금도 나는 나 자신을 가르치고 독려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한 가정, 한 가족의 희망도 자녀 교육에 달려있다. 그것은 개인도 국가도 마찬가지다. 교육보다 더 생산적이고 확실한 투자는 없다. 그렇다면 우연히 택한 나의 직업이 결과적으로는 최고의 현명한 선택이 된 것이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했다. 가르치는 일은 나에게 항상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 준다. 공자 말씀처럼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이 말의 참뜻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나를 깨우쳐가는 과정이 여간 값지고 보람된 일이 아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 라는 요즘 노년층에서 유행하는 노랫말처럼 사랑만 그런게 아니고 배움도 마찬가지다. 만시지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늦어 못 배우는 법은 없다. 이제부터라도 자신을 닦는 일이 노년의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겠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다. 이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요 교훈이다. 수신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가정을 다스리고 사회에 나가 남들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가정교육과 평생교육은 이래서도 필요한 것이다. 호기심을 잃는 날부터 사람은 늙기 시작한다는 말도 있다. 나는 근자 수 년째 한문공부에 심취된 상태이다. 익히면 익힐수록 재미가 있고 보람이 있는 것이 한자요 한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게는 크고 작은 옥편이 대여섯 권은 된다. 지난 주에도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렀다가 책이 하도 예쁘고 마음에 들길래 거금을 들여 한한명문대옥편을 한 권 사들고 나왔다. 내 책상 위에 산뜻한 모양의 새 책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화사한 화분보다는 책이 휠씬 낫다. 한문교육관련 전문교재만 해도 스므남 권도 넘지 싶다. 그 중에는 현재 중·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각종 검인정 한문교재는 물론이요, 지하철 한자여행, 한자암기박사, EBS 수능특강한문, 논리한자사전이라는 이름의 책들도 있다.
지금도 방학 때만 되면 나에게 한문 배우겠다는 학생들이 줄을 선다. 한자공부는 곧 우리말 공부다. 저학년 때는 공부를 잘하다가 상급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성적이 떨어지는 아이들이 많다. 낙오자가 되는 주된 원인은 새로운 어휘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어휘를 소화할 줄 아는 아이들은 상위권을 유지하는 반면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낙오자가 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공부 잘하는 비결은 우리말 공부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중요성을 진작 깨닫지 못하고 있다.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서도 부모나 어른들은 어린 자녀들에게 우리말을 신중히 지도해야 한다. 국어사전을 찾아보지 않는 사람 치고 우리말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알고 보면 그런 사람은 쓸모없는 헛똑똑이일 뿐이다. 확실하지 않으면 무조건 사전과 상의하면 된다. 사전 찾는 희열을 모르는 사람은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 될 수 없다. 지금도 나는 하루에도 수 십 차례 옥편이며 국어, 영어사전 등을 찾아보지 않고 지나는 날은 거의 없다. 사전도 한 두 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말을 바로 익히고 바로 쓰기 위해서는 그 뿌리인 한자부터 이해해야 한다. 뿌리가 튼튼하지 못한 나무가 어떻게 낙낙장송이 되겠는가.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나는 우리말을 지도하는 이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질나자 보리양식 떨어지는 꼴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그러기에 건강 다지는 일이 나의 최우선 과제이다.
8, 7급 한자를 가르치기 위해 훈장으로 변신한 나는 2, 1급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한 일(一), 사람 인(人), 메 산(山), 물 수(水), 넉 사(四)자를 제대로 가르칠 수 있다. 획, 필순, 부수 그밖에 한자를 만든 원리와 쓰는 원리인 ‘육서(六書)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한자 지도는 할 수 없다. 한문 좀 안다고 가르칠 수는 없다. 그야말로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하나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열 가지, 백 가지를 알아야 한다. 관련 서적을 읽고 끊임없이 연구를 거듭해야 한다. 그래야 쉽고 재미있게 가르칠 수 있다. 강의가 어렵고 따분하면 어린 아이들은 오지 않는다. 노년에 한자 지도 만큼 재미있고 보람된 일도 없을 듯하다. 우연히 들어선 길이지만 나는 참으로 현명한 선택을 한 것 같다. 사람의 과거는 현재의 토대요 바탕이다. 그것이 그 사람의 이력이요 경력이다. 그래서 학문의 세계에서는 특히 경력이 중요시되는 것이리라. 교사 시절은 나에게 분명 풀러스 알파요, 그로 인해 지금의 내가 더 큰 행복과 보람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 모두가 지난 10년 사이에 이루어진 일들이요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활동상이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은 내겐 참으로 의미 있는 날이다. 퇴임 후 3650일이 되는 날이다. 오늘부터 10년 뒤 이날에도 이렇게 이런 글을 쓰게 될 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나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그럴 확률은 얼마든지 있다.
2015-02-28
金英大 (仁松齎/草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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